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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

장수를 비는 궁(1)

     

    오늘 궁궐 나들이는 덕수궁(7월 1달동안 모든 궁궐을 무료 개방한다고 한다.)

     

    덕수궁(德壽宮) 조선 말기, 대한제국과 그 영욕을 함께한 의미있는 궁이다.

    덕수궁은 본디 왕궁이 아니었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곳이다.

    고종 황제는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후, 왕궁을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도 이곳에 거처하였는데,

    이때부터 고종 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원래 이름인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현재 남아 있는 덕수궁의 영역은 대한제국 당시의 1/3정도만 남아 있다.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은 원래 정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한문(大漢門)을 정문으로 삼았다.

    대한문의 이름은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름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1900년대는 친일파들이 득세하였고 배정자 라는 여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서 사람들은 안()자를 빗대어 갓을 쓴 여자가 궁을 드나들면서 고종을 현혹해

    나라가 망한다고 하여 대한문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원래 대한문의 위치는 사진에와 같았는데,1914년 태평로가 뚫리면서, 1968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두 번 뒤로 밀려났다.

     

     

    궁궐마다 있는 금천교는 2개라고 한다.

    원래 정문인 인화문과 연결되었던 금천교가 궁역 확장중에 사라지고, 대한문과 연결된 현재의 금천교만 남아있다.

     

     

    근천교 옆의 하마비(下馬碑)

    하마비에는'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라고 새겨져 있다고...

     

     

    메르스때문에 7월 한달 무료입장이었지만,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았다.

     

     

    중화문 근처의 인화문 터...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 창덕궁의 홍화문(弘化門), 덕수궁의 인화문(仁化門)

    이렇게 궁궐의 정문 이름에는 화(化)가 들어가 있다.
    화는 될화(化)로 교화(敎化)를 의미하며 조선의 정치이념인 유교에서 유래됐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가르키고 풍속을 교화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고종이 아관파천 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올때 인화문을 사용했다고 한다.

     

     

    광명문(光明門)은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남쪽 대문)이었는데 1904년 화재로 함녕전이 소실되고 이 문만 남은 것을

    1938년 석조전 서관을 증축하여 덕수궁미술관으로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옮김겼다고 한다.

    광명문에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흥천사 종(보물 제1460호)'과 '보루각 자격루(국보 제229호) 및 '신기 전기 화차'가 보관·전시되어 있다

     

     

    석조전 앞의 분수대 정원으로 땅을 파내고 아래로 들어간 정원이다. 

    이는 당시 일본이 덕수궁 지하에 혹시 조선왕실이 숨긴 자료들이 있을지 파헤치기 위해서 저 정원을 팠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분수대의 물개상도 2006년 어느 젊은 남자가 파손하는 수난(?)을 당했었다고 한다.

    "물개 조각상은 일제가 민족말살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문화재가 아니며, 이를 철거해야 한다"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으로, 근대미술품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원래는 1938년 일제가 석조전의 전시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이왕가미술관'으로 개관했던 대형 전시관이었다.

    세간에는 '덕수궁미술관'이란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석조전은 덕수궁 안에 있는 근대 서양식 건물로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의 건축을 모방해 지은 것이다.

    고종(高宗)께서는 석조전에서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하지만 석조전은 대한제국 시기에는 실제적으로 제대로 활용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영친왕이 귀국했을때 자주 이곳을 숙소로 사용하였다.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석조전의 정면 용마루에는 오얏꽃 문양이 조각돼 있는데, 이는 이씨 조선을 상징하는 것으로,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외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외교활동을 하려는 황실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준명당은 고종황제가 침전과 편전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또한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빼앗긴 슬픔 가운데 태어난 덕혜옹주를 위해 이곳 준명당에 유치원을 세우기도 했던 곳이다.

     

     

    준명당의 '명'자는 눈목자(目)를 썼는데 이는 일본을 뜻하는 날일자(日)를 쓰지 않은 것이며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즉조당

    즉조당의 의미는 왕이 즉위를 한 곳이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여기에서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하셨다

    현판에는 '광무구년을사칠월(光武九年乙巳七月)'이라는 고종의 어필이 있다.

     

     

    즉조당 대청마루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柱聯-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나 그림)

    대한제국이 오래도록 번영하기를 바라며 쓴 글이라고 한다

     

     

    이런...덕수궁 건물들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건물인 석어당이 공사중이다.

    보수는 하되, 예전 모습 그대로이길...

     

    (오래전에 찍은 사진)

    석어당은 궁궐 안에서 유일하게 단청이 없고 2층 구조인 건물이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西宮-경운궁)에 유폐하였다.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이것은 패륜이 되어 반정의 빌미를 주게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어 석어당 앞뜰에서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고 하여

    그때부터 석어당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라고 한다.

     

     

    아치형의 유현문은 다른 문과 달리 바닥에 대리석을 깔고 대리석 위로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문을 지나면 머리가 절로 좋아진다는 설 때문에 수능이 다가오면 이 문을 들락거리는 수험생들이 많다고...

    호암 미술관 바깥마당과 죽림을 연결시키는 대문은 덕수궁의 유현문을 본따 만들어졌다

     

     

    정관헌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동서양 절충식 건물은 고종황제가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이다

    서양식 건물이라고 하나 팔작지붕 등 전통 목조 건축의 요소도 적지 않게 있고, 어딘지 중국풍이 느껴지기도 하다.

     

     

    천장 가까이 왕을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고...

     

     

    대한 제국을 상징하는 오얏무늬가 들어가있는 것은 대한제국 이후 만들어졌거나 보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 전통 문양을 넣었다.

     

     

    기둥을 자세히 보면 다른 용도를 위해, 혹은 추위를 피하기위해 칸막이를 붙였다 뗀 흔적이 있다.

     

     

    1896년 아관파천 당시 커피를 처음 맛본 고종은 덕수궁으로 돌아온 뒤에 '정관헌'을 만들어 가배(커피)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서울 정동 일대는 19세기 말 강대국들이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던 무대이다.

    그래서 정동 일대에는 지금도 세계 여러나라의 대사관들이 있는데, 덕수궁 담과 영국 대새관도 붙어 있다.

     

    현재 주한영국대사관 부지 70m와 일반인 출입이 통제된 연결도로 100m 등 170m가 끊겨 있다

    영국대사관 부지에 막혀 끊어졌던 덕수궁 돌담길이 130여 년 만에 연결된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시-영국대사관, 덕수궁 돌담길 개방 놓고 '온도차'(?)때문에 올해 연결될지는 의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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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

    별의별 속설이 등장하지만 이곳에 이혼을 담당하는 가정법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고..

    돌담길을 따라 걷던 부부의 이혼길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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