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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

종묘(宗廟)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 유한준(兪漢雋, 1732~1811)

     

     

    이번주는 '종묘(宗廟)'

    아 거기? 임금 무덤있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종묘의 '묘'는 무덤 묘()자가 아닌 사당 묘()자를 쓴다.

    임금은 살아서는 궁중에서 머문다. 사후에는 육신은 왕릉에, 혼은 종묘에 거처한다

    이곳은 육신이 아닌 '정신, 혼'을 모신 사당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종묘(宗廟)'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이다.

     

     

    종묘는 1회 관람인원은 최대 300명이며, 관람예약을 하거나 현장에서 관람권을 구매하여 해설사와 같이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매주 토요일 및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문화가 있는날)은 자유관람이 가능하다.

    넓은 편이 아니라 관람시간은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더위탓도 있겠지만, 메르스 여파가 여전한지 오늘 10시 20분 관람은 나를 포함 2명이었다.

     

     

    종묘는 신들을 위한 공간으로 출입하는 사람이 극히 제한됐기에 현판을 부착하지 않았다

     

     

    종묘는 1394년(태조3년) 기공되었고, 1995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종묘의 구성물들을 연결해 주는 길로 종묘 내부는 삼도(三道)로 이루어진길로 연결되어 있다

    가운데 길로는 신들이 다녔고, 동쪽과 서쪽 길로는 각각 왕과 세자가 통행했다고 한다.

     

     

    종묘의 연못은 화재시 방수용으로 사용하기위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보통 궁궐은 소나무를 많이 심지만 종묘는 제를 지내는 공간이기 때문에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망묘루 (望廟樓)- 왕이 종묘에 도착하면 잠시 머물러 쉬던 곳이다

     

     

    향대청- 종묘에서 사용하는 향, 축, 패를 보관하는 창고 건물

     

     

    재궁- 왕이 세자와 함께 제사 하루 전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던 곳으로 '어숙실'이라고도 한다.

    종묘 안에 여성들이 출입하는 일은 없어서 음식 만드는 사람들도 '숙수'라고 하여 모두 남자들이 준비했다고 한다.

     

     

    전사청은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이다

     

     

    전시청 앞을 보면 두개의 단이 있는데 왼쪽 천막단에는 준비된 제사음식을 올려 놓으면 왕이 하나하나 살펴보았고

     

     

    오른쪽의 단은 살아있는 상태로 데려온 소, 양, 돼지등을 데려오면 왕이 상태를 살펴보고 제물로써 정합한지 결정했다고 한다.

     

     

    옛 선조들은 신주(神主)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

    신주는 장례를 모신 현장에서 밤나무와 뽕나무 목(木)에 조상신령을 옮긴 것으로 두 본(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위패는 신주를 복제한 것이어서 여러 본을 나눠 모실 수가 있다.

    임진왜란 때 종묘가 전소됐지만 임금의 신주는 훼손 없이 몽진해 오늘날까지 원형이 보존된것이다.
    이후부터 ‘신주 단지 모시듯 한다’는 속담이 유래됐다고 한다

     

     

    신주를 모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모시는 방법과 좌우증축으로 모시는 방법이 있다

    정전서쪽에서 동쪽으로 모시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정전은 칸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구조이지만, 19칸이 옆으로 길게 이어져 우리나라 단일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이다.

    이처럼 건물 길이가 긴 이유는 조선왕조가 지속되면서 봉안할 역대왕의 신위가 늘어나면서, 이에 따라 증축했기 때문이다.

    정중앙을 기준으로 동쪽 4칸은 300년전에, 그리고 또 동쪽4칸은 200년전에 증축되었다.

     

     

    왼쪽에 태조부터 모셔져 있는데..

    태조를 서쪽에서부터 모신 것은 산자들의 높은 곳은 해가 뜨는 동쪽이지만, 죽은자들의 높은 곳은 해가 지는 서쪽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전의 서쪽으로 영녕전을 짓게 된 동기는 시간이 흐르고 죽은 왕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을 늘리거나 새로 지어야 할 필요 때문이었다.

    영녕전은 세종 3(1421) 정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지은 것으로,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 곳이다.

    영녕전은 가운데 네 개실을 기준으로 서쪽, 동쪽, 서쪽, 동쪽으로 모시는 좌우증축 방법으로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에는 19명의 임금과 30명의 왕후, 영녕전에는 16명의 임금과 18명의 왕후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영녕전에는 '마지막 황태자'로서 1970년에 사망한 영친왕(의민황태자) 부부의 위패도 모셔져 있으므로,

    조선시대에 이곳에 모셔진 것은 15명의 임금과 17명의 왕후다

     

     

    하지만 실제 임금은 25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9명은 죽은 뒤에 격상된 추존 임금이다.

    (태조 이성계의 4대 선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왕세자의 신분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덕종,진종 ,장조 ,익종

    그리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아버지 원종 이렇게 9명이 추촌 임금이다)

     

    연산군·광해군의 신주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장희빈과 폐비 윤씨의 신주도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추존임금이 존재하고, 연산군과 광해군, 장희빈, 폐비 윤씨가 존재 하지 않는 이유..

    이는 승자의 역사를 합리화하기 위함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는 동전과도 같다 생각이 든다. 양면성...

     

     

    오늘도 공부하느라 힘든 큰아들이랑 점심 데이트

    점심 먹고 근처 청계천에서 깎아간 참외도 먹으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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