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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

왕실 사람들의 마음

    창덕궁은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했지만,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던 궁이다. 

    경복궁이 정궁이었지만 왕들은 창덕궁을 더 선호했다고 알려진다.

     

    세종께서 문종에게 이르시기를 경복궁은 비록 장려하나 이 도성의 바른 명당은 바로 창덕궁이다 - 성종실록, 성종15년 10월 11일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는 창덕궁의 '돈화문'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회화나무가 보이는데, 나이는 약 300년쯤이라고 한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고..

     

     

    궐내각사란 조선왕조의 관청 즉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관원들의 관사로 궁궐안에 지어진 건물을 말한다.

    돈화문 앞쪽으로 궐내각사가 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없어졌다가 2005년 복원되었다고 한다.

     

     

    역대 선왕들의 책과 어필, 서화 등을 함께 보관하던 규장각

     

    규장각의 검서들이 당직하던 규장각의 부속건물인 검서청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인 선원전

     

     

    임금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인정전 가까이 지어졌던 약방

     

     

    본격적으로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진선문과 금천교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할을 하므로 금천(禁川), 그곳에 만들어진 다리를 ‘금천교(錦川橋)’라 불렀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란다.

     

     

    금천교를 지나면 진선문이 있다.

    이 문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일반 백성들이 돈화문과 금천교를 지나 신문고를 칠 수 있었을지..

     

     

    진선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넓은 마당은 즉위식이나 각종 큰 잔치 혹은 중대한 재판을 진행하던 곳이다.

    이 광장은 특이하게 사다리꼴 모양인데, 이는 인정전을 지나 동남쪽 종묘로 흐르고 있는 지맥선건드리지 않기 위함이라고..

    진선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쪽에 내전으로 들어가는 숙장문이 자리하고

    왼편으로는 인정문과 행랑 오른편으로는 상서원,호위청등이 있었다고 한다.

     

     

    상서원은 ‘상서로운 기물을 맡은 관서’란 의미이다.

    상(尙)은 맡는다는 의미이고 서(瑞)는 국가의 기틀을 유지하는 모든 중요한 물건을 뜻한다

     

     

    호위청은 조선 국왕의 호종과 호위를 맡은 관청이란 의미이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궁중을 호위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라고...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인정문에서는 국왕의 즉위도 거행되었는데, 효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등이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고...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인정전 지붕에 5개의 배꽃 무늬가 보이는데...

    왕국에서 제국으로 나라의 국격이 일종의 '승격'을 하면서 문양을 사용한 것인데,

    일제가 조선왕실이 일개 왕의 가문 즉 이씨왕조로 격하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인정전의 박석은 일제가 걷어내고 잔디를 깔았었는데, 해방후 다시 복원해 놓았다.

     

     

    인정전 월대 계단에는 세 개의 길이 만들어져 있다.

    중앙의 계단 가운데 경사진 돌판에 선정을 베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봉황 두 마리가 조각돼 있다

    왕만이 오르는 신성한 계단인데, 관광객들의 부주의로 파손이 많이 되어 팬스를 쳐 놓았다고 한다.

     

     

    1.일월오병도

    조선시대 임금이 계시는 곳에는 항상 일월오병도가 있어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일월오병도에는 해와 달 다섯개의 봉우리 소나무와 폭포 물보라 등의 그림으로 구성되어있다.
    해와 달-우주의 음과 양의 조화를 통한 쉼없는 생성을 뜻한다.
    다섯개의 봉우리는 우리나라 5대 명산-동(금강산), 서(묘향산), 남(지리산), 북(백두산), 중앙(삼각산)을 상징

    붉은 소나무 두 그루- 땅과 하늘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땅과 폭포 그리고 물보라는, 산과 강 그리고 하천을 표현한 것으로 조선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임금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쉼없이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왕의 그림은 일월오봉도, 일월오악도, 일월오병도, 일월곤륜도 등 불리는 이름이 다양하다

    2.닫집

    '닫집은 본래 존귀하고 신성한 분과 그 형상에 먼지 비바람 태양빛 등이 직접 닿지 않게 하거나

    신성하게 보일 목적으로 건물 안에 설치한 작은 집이다.'

     

    창덕궁 잡상 중에는 인정전에 있는 잡상 개수가 9개로 가장 많다. (궁궐중에는 경복궁 경회루에 있는 잡상이 11개로 제일 많다)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문무관으로 각각 18품계를 새겼다.

    1품부터 정9품까지 죽 서고 그 뒤에 종1품부터 종9품까지 서는 줄 알았는데...

    3품까지는 정(正)과 종(從)이 있으나 4품부터는 정(正)만 있다.

     

     

    햇빛을 가리는 차일을 쳐야 했으므로 마당에 쇠고리가 남아 있다

     

     

    선정전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선정문에서 선정전까지는 비나 눈을 피할 수 있는 복도행각이 설치되어 있다.

     

     

    선정전은 다른 전각들과 달리 지붕도 청색 유리기와로 덮은 청기와인데 이 기법은 중국에서 도입한 것으로

    회회청(回回靑)’이라는 비싼 안료를 수입하여 청기와를 구웠다고 하며,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집이다.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하게 건물 앞쪽에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이 생겼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게 설비되었다고 한다.

    (이곳 희정당에서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의 장례식이 열리기도 했다)

     

     

    화려한 자개 의자

     

     

    프랑스에서 수입한 책상

    이곳은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로, 시대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세종이 앵두를 좋아하셔서 문종이 세자궁 옆에 앵두나무를 심어가지고 앵두가 익으면 아버지께 가져다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고...

     

     

    동인문(同仁門)은 희정당의 동쪽문이다. 현재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걸린 왕세자가 거처하던 관물헌(觀物軒)과 연결되어 있다 

    동인(同仁)이란 '차별없이 인애를 베불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동궁의 부속건물들로 좌측부터 칠분서(七分序),육각누각인 삼삼와 (三三窩), 그리고 승화루(承華樓)이며,

    모두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성정각 일원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이 있던 곳이다.

    세자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아서 궁궐 안 동쪽에 거쳐를 마련하여 동궁(東宮)이라 했다.

    성정각은 세자의 공부방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왕실의 내의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자시문(資始門)1782(정조6) 지어진 중희당(重熙堂)의 서문이었다.

    훗날 일제가 중희당을 없애고 그 자리에 후원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그 탓에 본디 중희당의 서문이었던 자시문(資始門)

    지금은 마치 내의원(성정각의 동문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근왕파를 앞세워서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명성황후가 구식 군대의 반란(임오군란)으로 상궁으로 변장하여 이 문을 지나 피신했다

     

     

    낙선재 일원 앞 뜰에 있는 사모정(네모 반듯한 정자)은 시신이 궁 밖을 나가기 전에 잠깐 대기하는 장소로 쓰였다고...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를 위한 집이었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여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지었다.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낙선재는 어찌보면 구중궁궐 한많은 여인네의 삶이 깃들여 있는 곳 같다.

     

     

    흥선대원군이 현판을 쓴 장락문(長樂門)이 낙선재의 정문 역할을 한다

     

     

     

     

     

    누마루 아래에는 얼음이 깨져 있는 듯한 빙렬문(氷裂文)이 있다.

    마치 얼음이 깨진 것처럼 보이는 이 문양은 아궁이 옆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화재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누마루와 그 뒤 온돌방 사이의 만월문이 아름답다.

     

     

    부엌이 없어서 음식을 데우고 상을 물리는 퇴선간(退膳間)이 있었다는 흔적의 문패가 보인다.

     

     

     

    낙선재 석복헌의 난간에는 다산을 상징하는 호리병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굴뚝을 받치고 있는 구조물에는 장수를 뜻하는 '수'(壽)' 자가 있다

     

     

    정전이 아닌 일반 궁궐 건물의 암막새에는 알을 많이 낳아 다산을 의미하는 거미문양을 많이 쓴다고..

     

     

    직선과 면으로 구성된 석쇠 무늬가 보인다. 이 무늬는 그물을 엮은 모양이라 하여 악귀가 이 그물에 걸려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겼다.

    석쇠 문양 안에는 육각의 무늬가 있다.이는 천년이나 수를 누린다는 거북이 등을 상징한다.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은 개방돼 있지 않아서 멀리서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구중궁궐 [九重宮闕] / 문으로 겹겹이 막은 깊은 궁궐이라는 뜻으로, 임금이 있는 대궐을 이르는 말

    화려해 보이는 구중궁궐의 왕들이나 여인들중에 정말 행복했던 사람들이 몇이나 되었을까...

    혼란한 세상에 왕이 되기 싫은 충녕대군의 마음을 잠깐 생각해 보았다.

     

     

     

    지난주 주중, 여러가지로 시끄러운 날..

    저녁 무렵 큰아들과 데이트 하기전 혼자 창덕궁을 찾아 문화해설사 설명을 들었다.

    메르스 여파로 너무도 한적한 궁궐...혼자 설명을 듣게 되어 미안해 취소할려다가 듣게 되었다.

    전직 국어교사였다가 여행작가가 되기위해 문화해설사가 되었다는 해설사의 명쾌한 설명...

    손톱만큼 궁궐에 대해 아는 부분이 있다보니, 더 신나서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해주었다.

    어제 9시 문을 열자마자 다시 찾아 혼자서 못다본 전각들을 보고 나오는데 뒤에서 "선생님~"

    나랑 상관없는 호칭인데 2번이나 부르기에 뒤돌아봤더니 "또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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