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에 지은 수강궁을 지었다.
이후 성종 임금 대로 와서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을 짓고 창경궁이라 명명한 궁이다.
1909년 창경궁은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원하면서 많은 전각들이 헐려 버렸고, 1911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바뀌었다.
해방 후에도 창경원으로 계속 존속해 오다가 1984년부터 복원을 통해 비로소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다른 궁궐의 정문은 남쪽을 향하고 있지만, 창경궁의 정문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메르스가 좀 안정 분위기에 무료개방이어서인지, 오후에 가서인지 제법 사람들이 있었다.
궁궐의 정전(正殿)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정전의 정문과 궁궐대문 사이를 흐르게 한 금천을 건너게 되는데...
창경궁의 금천교는 '옥천교'이다.
옥천교는 현재 유일하게 자연수가 흐르는 금천이라고 한다.(하지만 지금은 가물어 물이 없었다)
홍예가 이어지는 난간 아래의 공간에는 억센 표정을 하고 있는 도깨비(나티) 얼굴을 돌에 새겨놓았다.
다리의 양옆에 두어 이 곳을 오가는 이들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자세히 보면 명정문 넘어 명정전이 바로 보이지 않고 옆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명정문의 중심축이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고..
명정전은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답도는 역시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명정전 내부는 다른 궁궐처럼 일월오봉병이 있다.
다른 궁궐 천정에는 용이 주로 새겨져 있는데, 이곳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었다.
명정전은 창호의 아랫부분을 전벽돌(흙을 구워 만든 납작한 벽돌)로 쌓아 올린 점이 특이하다.
1820년대에 제작된 <동궐도>에 나타난 명정전 조정의 모습에는 어도만 있고 품계석이 없다는데...
박석도 일제시대때 공원화 하면서 다 걷어내고, 꽃을 심었었다가, 나중에 복원하면서 원래 박석은 아니라고...
이곳에도 "자나 깨나 불조심!" 상징적인 '드므'가 있다.
숭문당은 숭상할 숭, 글월문, 집당으로서 학문을 숭상한다는 뜻의 건물이다
'숭문당' 편액은 영조의 어필이다.
문정전은 왕과 신료들이 국정을 논하던 편전으로, 모든 외전이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 건물만 남쪽을 향하고 있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신하들이 자결을 말리자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뒀다.
뒤주는 문정전에서 선인문 앞으로 옮겨졌고,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만에 생을 마감했다. 세자의 나이 28세였다.
바로 그 장소인 문정전
빈양문은 외전과 내전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에 있는 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잔디를 무덤에만 사용했다고 한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옮기거나 만들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 조상들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궁궐에 잔디가 있는 경우, 대부분 일제시대때 파손된 곳이라고 보면 맞다고...
궁궐 뜰 한쪽이나 뒷담에는 '꽃나무가 심어진 계단'이란 뜻의 화계가 있다.
화계를 만드는 이유는 경사지에 건물을 배치할 때 지대가 높은 쪽의 흙이 밀려 내려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한번 들어오면 죽지 않고는 나갈 수 없던 궁궐의 여자들이 꽃이라도 구경하며 스트레스를 풀게 하기 위함이라고....
공사중이지만, 유교를 국교로 삼는 조선왕실 공간에 불탑이라니..이는 일제시대때 창경원이 되면서 옮겨진 것이라고...
함인정은 왕이 노닐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고 때로 신하들과 함께 경연을 열기도 했던 곳이다.
함인정 내부에는 4개의 편액
봄 물은 사방 연못에 가득하고(春水滿四澤),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도 많도다(夏雲多奇峯).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드날리고(秋月揚明輝),
겨울 산마루엔 한 그루 소나무가 빼어나도다(冬嶺秀孤松).’
도연명 의 시로 알려진 「사시(四時)」를 한 구절씩 새긴 것이다.
보통 궁궐의 구조는 크게 외전과 내전, 후원으로 나뉘는데, 창경궁은 다른 궁에 비해 정무를 보는 외전보다 내전이 더 크다.
세 명의 대비를 위한 궁이다 보니 생활공간인 내전이 더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경춘전은 왕비나 세자빈의 생활공간이었다
이곳은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승하한 곳이며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을 겪은 혜경궁 홍씨도 경춘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곳에서 승하했다.
경춘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다
환경전은 주로 빈전 등의 용도로 많이 쓰였으며, 효명세자의 빈궁 역시 이곳 환경전에 차려지기도 했다.
환경전은 대장금이 중종을 마지막까지 진료한 곳이기도 하다.
통명전은 창경궁에 있는 왕의 침전 겸 앞쪽의 박석이 깔려져 있어 연회용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이 곳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궁중암투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그 언덕 위에 자경전(慈慶殿)이 자리잡고 있었다.
통명전 옆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고
건물 뒤쪽에 꾸민 정원이 한층 더 정감 어린 풍경을 만들고 있다
통명전 오른쪽이, 왕의 편전이나 내전의 접대공간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양화당이다.
(양화당이 공사중이라 예전에 찍었던 사진으로...)
영춘헌과 집복헌...주로 후궁들이 거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임금은 자신이 총해하는 수빈 박씨(정조 다음 왕인 순조를 낳았다)를 보러 이곳에 자주 들렀다고 한다.
영춘헌은 서재로 사용하였고 정조는 이곳에서 승하했다고
공사중인 양화당과 집복헌 사이의 커다란 암반..이곳에도 행각이 있었을 꺼라는 추정이 된다.
<궁궐지>에 의하면 자경전은 정조때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건립되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창덕궁과 경희궁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재는 풍기대
현재 춘당지는 네모반듯한 조선시대 인공못과는 달리 우둘투둘한 호리병 모양이다.
자경전 터에서 내려와 바로 보이는 것은 원래 춘당지가 아닌 내농포라는, 왕이 농사 시범을 보이던 논이 있던 자리였다고...
창경궁은 궁궐 중에 나무 종류가 가장 많은데, 여기엔 사연이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07년 일제는 창경궁의 많은 건물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또한 여자를 위한 궁궐인 창경궁에는 여자를 상징하는 버드나무도가 많다
버드 나무옆의 백송(하얀소나무) 3그루가 눈길을 끈다.
일제가 창경궁에 동물원과 함께 지은 식물원
1909년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 온실이다.
예전에는 종묘와 창경궁이 이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창경궁과 창덕궁이 이어져 있다.
각각의 요금을 내야하지만, 7월은 무료여서 통과...
창덕궁에 찾아볼 것이 있어서 잠깐 들렸다.
대조전 뒤편에 이르면 선조임금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망의라는 관복을 보관하던 '경훈각'이라는 전각이 보인다.
대조전과 복도와 행각으로 이어져 있는 경훈각에는 동서 각각 2개의 아궁이가 있는데...
서쪽 측면 아궁이 위에는 왕의 화장실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작은 문이 있다
이 문 안에는 조선 왕들의 이동형 변기라 할 수 있는 매화틀을 꺼내
내의원으로 가져가는 바퀴달린 작은 수레가 있다고...
오늘도 아들과 점심데이트(메밀국수)..,그리고 아들은 공부하러, 난 창경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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