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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이야기

장수를 비는 궁(2)

     

    중화문

    중화문을 보면 가운데가 양쪽보다 크고 높은데 어(御門)으로, 임금이 지나는 문이기 때문에 신하들이 지나는 문과 차이를 둔 것이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중심 건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다.

     

     

    품계석...

    1품부터 3품까지는 정(正)과 종(從)이 모두 표기되어 있고 4품부터 9품까지는 정(正)만 표기되어 모두 12개가 서 있다.

    관료들은 자신의 품계에 따라 품계석에 맞추어 서게 되는데,보통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섰다고 한다.

    동반은 문반이고 서반은 무반(그래서 동반서반 둘을 합쳐서 양반이라고 한다.)

     

     

    중화전 정전 정4품 품계석 옆에 이렇게 뚫린 구멍이 남아 있는데...

    원래 금천교가 이 구멍 아래로 추정된다고...

     

     

    중화전을 오르는 계단 '답도'에 새겨진 '두 마리의 용'이다.

    조선시대 궁궐 정전 중, 봉황 대신 '용'이 새겨진 유일한 '답도'다.

    경복궁 답도처럼 봉황을 장식하지 않고 용을 장식한 이유는 중화전이 대한제국 출범 이후 세워진 전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장식'한 것이다.

     

    중화전 앞에 뚜껑이 도망간, 태극 문양이 있는 정(鼎)이 양쪽에 놓여 있다

    궁궐중에 이 정이 놓여있는 곳은, 경복궁 근정전과 덕수궁 중화전 뿐이라고 한다.

    왕이 중화전에 계실때는 이곳에 향을 피워 왕이 계심을 알린다고 한다.

     

     

    정의 발이 세개인 것은 천 .지. 인.을의미하며, 왕권의 상징 이라고 한다.

    세발 아래 둥근돌은 하늘을의미하고 8각의 돌은 사람을 그 아래 모서리의 각은 방형 즉 땅을의미 한다. 

     

     

    드므

    목조로 지어진 궁궐에 불이 날 경우 방화에 사용할 물을 담아두던 용기라고..

     

     

    그런데 궁궐 중 유일하게 덕수궁 드무에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서쪽에는 희성수만세(囍聖壽萬歲: 임금의 수명이 성스럽게 만년토록 오래 지속 되기를 됨을 기쁨으로 바란다.)

    동쪽에는 국태평만년(國泰平萬年: 나라가 태평(太平)스럽게 영원토록 오래 지속되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대한 제국의 법궁인 덕수궁에만 향로가 있다.

    뚜껑 없이 법궁을 지키고 있던 덕수궁 향로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유물창고 정리 과정에 2010년 발견되었으나, 

    다시 유물창고로 들어가 뚜껑 없이 중화전을 지키고 있다.

     

     

    고종은 덕수궁에 오면서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중화전은 다른 궁처럼 해와 달과 다섯 봉우리를 그린 병풍인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 이 있으며..

     

     

    천정의 용과 같은 문양으로 덕수궁이 대한제국 황제의 황궁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중화전에서 본 다른 궁궐과의 차이점은 전각의 창문 틀은 황제가 사용한다는 황금색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황제 궁에 잡상을 11개를 올리고 세자궁은 9개를 배열하는 식으로 항상 홀수로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중국의 예와는 달리 잡상의 수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고 한다.

    중화전의 잡상은 홀수가 아닌 짝수로 10개였다.

     

    '잡상'의 다른 명칭은 '어처구니'이다.

    목수가 건물을 완성하고 마지막으로 올려놓는 어처구니를 깜빡 잊고 올려놓지 않아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함녕전을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바로 옆의 덕홍전은 외국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

    이 건물은 특이하게 전체의 평면이 정사각형에 가깝다

    편전중에 유일하게 여닫이 문을 설치되어 함녕전과 복도로 연결되었었다고 한다.

     

     

    덕홍전은 전기시설을 갖추고 있다.(최초의 전등은 1887년 경복궁 내 건청궁에 설치)

     

     

    역시 이곳에도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무늬'장식이 있다.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된후 거처하던 침전이다.

    1919121일 고종황제가 함녕전에서 68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승하하였다(일본의 독살설이 있다.)

    시신을 직접 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에게 말하길..

    건강하던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만에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시신을 살펴보니 이가 다 빠져있고 혀는 심하게 상했으며 목부터 복부까지 검은 줄이 길게 나 있었다

    또한 팔다리가 부어올라 수의를 입히기 위해 입고 있던 옷을 찢어야 했다는 것이다.

     

     

    함녕전 서쪽 아궁이는 1904년 덕수궁 대화재의 발화지점이다.

     

     

    당시 정치적  상황과 백탄을 사용하는 온돌 구조로 보아 일본측의 방화로 보는 견해가 다수라고...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공식 실록으로 태조에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의 기록으로 끝나고 있고

    그후의 기록은 안타깝게도 일제시대라 남아있지 않아 당시 상황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함녕전 뒤쪽으로 굴뚝이 보인다.

    주로 목조로 지어졌기때문에, 궁궐의 굴뚝은 건물 가까이 지으면 화재의 위험이 있어서 멀리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덕수궁의 전각들 사이의 담들이 다 사라졌지만, 연결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오늘 알았는데, 궁궐 해설사에는 서울시문화재해설사, 우리궁궐지킴이, 우리궁궐길라잡이 세종류의 해설사들이 있다.

    나는 오늘 10시 해설을 들었는데, 우리 궁궐지킴이 해설사의 설명으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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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큰아들과 도시락 데이트..비빔밥,감자전, 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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