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더위를 피해 엄마와 역사가 잊고 나라가 감췄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 영화를 보았다
영화이다보니 허구 부분이 많이 가미되어 살짝 실제인지 허구인지 혼동 스럽기는 하다
덕혜옹주가 강제 징용된 조선노동자 앞에서 연설을 하거나, 한글학교를 세웠다는 이야기,
또 어릴 적 정혼자가 독립투사가 돼 나타나고 독립군이 폭탄을 투척하는 장면 등은 허구라고..
그 어려웠던 시대의 비슷한 인물이 많았을터이니 감안해서 보면 나쁘지 않고...
분명 덕혜옹주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었던 역사속의 비운의 여인이었다.
극중 김장한(박해일)도 상당부분 허구화 되있다.
김장한은 고종 황제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기자인 김을한의 동생이며 덕혜옹주의 약혼자였다.
고종이 덕혜옹주와 어릴 때 부터 정해 놓은 약혼자이지만 고종이 독살을 당하면서 약혼은 깨지고 말았다
덕혜 옹주의 귀국을 도와준 인물은 김장한이 아닌 그의 형 김의한 신문 기자에 의해서였다고....
덕혜옹주를 끝까지 괴롭혔던 친일파 한택수 역시 가상의 인물이었으나, 그 시대 그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비운의 왕 고종은 고종은 9남 4녀의 여러 자녀들을 두었는데 장성한 사람들은 4명이라고 한다.
순종(1874), 의친왕(1877), 영친왕(1897), 덕혜옹주(1912)
순종(1874~1926)은 2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의친왕(1877~1955)은 왕족신분을 버리더라도 조국 독립을 요구하며 상하이로 탈출을 기도했었다고...
의친왕에게는 여러 자녀들이 있는데, 비둘기처럼 다정한...을 부른 옛날 가수 이석씨가 의친왕의 아들이다.
영친왕(1897~1970)은 이방자 여사 사이에 이진(어릴때 사망), 이구등이 있다.
덕혜옹주는 조선말 역사의 소용돌이속에 고종 환갑 나이에 태어났지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덕수궁내에 덕혜옹주를 위해 유치원까지 만들었다고 하니...
고종황제가 침전과 편전으로 사용하던 덕구궁의 준명당, 이곳에 덕혜옹주 유치원을 세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독살로 추정되는 아버지 고종 승하이후 그녀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일본에 의해 14세에 일본으로 떠난 덕혜옹주
고종 독살의 기억과 나라를 잃은 슬픔과 어린 나이로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덕혜옹주는
해방이 되었어도 왕조가 부활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이승만정부의 반대로 돌아오지 못하고
대마도 귀족출신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하였지만 늘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소 다케유키에 대해 덕혜옹주를 학대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그는 덕혜옹주를 사랑했다고 한다)
딸이 유서를 써놓고 가출후 사망등으로 더 정신 분열증에 시달렸고 해방과 더불어
소 다케유키의 위치가 귀족에서 일반인으로 변하였고, 영친왕과 합의하에 이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14살에 일본으로 간지 51세에 돌아왔으니 37년만에 돌아왔다고 한다
(신문기자였던 김장한의 형 김의한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나를 매료시켰던 생기발랄한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일본말로 인사했으나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내가 다시 한국말로 "먼 여행 오시느라 피곤하신가봐요?' 했으나
옹주는 미소조차 띠지 않았다."
-이방자여사 말-
정신질환외에 중풍을 앓고 있던 덕혜옹주의 노년은 병원을 입퇴원 하는 고달픈 삶이었다.
왼쪽이 영화속 라미란 역인 유모 변복동씨는 돌아가실때까지 덕혜옹주를 모셨다고 한다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영친왕), 비전하(이방자여사) 보고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정신이 온전할 때 덕혜옹주가 남긴 마지막 말이라고...
덕혜옹주는 낙선재에서 이방자여사와 살다가 1989년 쓸쓸하게 돌아가셨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덕혜옹주 병상을 지키던 이방자 여사도 덕혜옹주가 돌아가시고 8일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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