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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행이야기

남산성곽을 다녀오다

     

    서울의 300m 높이의 북악산과 인왕산, 200m 높이의 남산, 100m 높이의 낙산, 서울 도심을 둘러싼 네 개의 산,

    즉 내사산을 따라 쌓여진 성곽이 서울한양도성(서울 성곽의 공식 명칭은 서울 한양도성)이다

     

    오늘도 친구들과 남산성곽쪽 도보관광을 다녀왔다.

    빨간선은 정규 코스이고, 분홍색은 우리끼리 더 다녀온 곳...

    오늘 총 걸은 거리는 대략 5.4km지만, 살짝 등산을 감안하면 6~7km정도 걸은 효과

    출발은 동대입구에서, 도착은 안중근 의사기념관

     

     

    을미사변ㆍ임오군란으로 순직한 충신ㆍ열사를 위한 제단인 ‘장충단비’

    장충단은 처음에는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였고, 196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사당은 한국전쟁 중 파괴되고 사라져 버렸다고...

    비의 전면에 새겨진 '奬忠壇'이라는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일 때 쓴 글씨라고...

      

     

    수표교

    원래는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해 수량을 재는 역할을 했던 다리...

    다리 옆에 서 있던 수표(물의 높이를 재는 표)는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신라호텔 자리에 세워졌던 박문사(절 이름 박문은 이토 히로부미의 이등박문에서 딴 것이다.)

    사찰 정문으로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뽑아서 가져다 세워놓고 경춘문으로 이름을 붙였다.

    해방 후에 이 흥화문은 일본이 세운 박문사 자리에 들어선 신라호텔 영빈관 정문으로 쓰이다가

    60년 가까이 지나서야 다시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신라호텔 안에는 정문 모양과 진입로 그리고 계단 등 박문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경춘문'이라는 명칭은 이토 히로부미의 호인 춘무(春畝)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에 찍은 경희궁의 '흥화문' 사진)

     

     

    내게는 사연(?)이 있는 장충동 태극당...여전히 있네.

    인터넷을 찾아보니 올해로 68년이 되었고, 창업주는 작년 별세하였다고 한다.

     

     

    장충동에서 독도까지 431km

    순수 고속도로의 길이만으로 한다면 서울-부산 거리는 417km라고 하니...

     

     

    1963년 2월 1일 개관, 리모델링중인 장충체육관을 지나 서울성곽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장충동에 성곽의 흔적이 있다니..

     

     

    공사실명제인 '각자석'

    태조 때 서울성곽을 처음 쌓을 당시 천자문의 글자 순으로 공사 구간을 정했다고 한다.

    북악산 정상에서 ‘하늘 천(天)’ 자로 시작해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북악산에서 ‘불쌍할 조(弔)’ 자로 끝난다

     

     

    남산성곽 이곳은 경상도에서 공사를 했단 흔적..대구 근처의 慶山

     

     

    성벽(체성) 위쪽에 쌓은 담을 여장 혹은 성가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 바깥을 내다보는 구멍을 내 적들을 살피고 공격했다. 위엔 옥개석을 덮는다.

    총안은 여장에 낸 구멍을 말한다.

    두 개는 멀리 보는 원총안, 가운데 한 개는 성 밑을 살필 수 있게 경사지게 뚫은 근총안이다

     

     

    이것은 복원과정에서 옥개석이 없이 돌과돌 사이를 회반죽으로 마무리한 것이라고...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의 남산의 소나무는 일제강점기에 크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1897년 일본인들이 남산 일부를 왜성대공원(지금 숭의여자대학 터)이라 이름 짓고,

    또 1909년에는 한양공원(남산 분수대 부근과 케이블카 승강장 150미터 남측 지점)을 조성해서

    산길을 닦아 일본 벚꽃나무를 대거 옮겨 심었다고 한다.

     

     

    남산 동측 자리에 위치한 타워호텔 일대는 조선시대 도성인 서울성곽 성벽이 지나던 곳이었으나

    군사정부가 자유센터를 건립하면서 성벽을 완전히 파괴했다.

    자유센터는 한국 근대건축의 거장인 고 김수근이 설계한 정부건물이었으며, 1969년 1월1일에 타워호텔로 바뀌었다.

    2010년 타워 호텔은 반얀트리 호텔로 바뀌었다.

    (타워호텔이 17층인 이유는 6.25참전국이 16나라+우리나라=17)

     

     

    1950년 세워진 아시아 최초 국립극장이다.

    한국 대표 공연장으로, 우리의 전통을 바탕으로 예술성 높은 작품을 선보이는 전통문화예술의 요람이다

    육영수여사가 1974.8.15 광복절 기념식때 저격당해 서거한 곳이기도 하다.

     

     

    국립공원에서 버스를 타고 남산타워 입구에 도착.

     

     

    남산타워라 불리던 N서울타워는 1975년 당시 방송 송출 전파탑으로 세워졌다가

    1980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됐고, 리모델링을 거쳐 2005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남산타워는 총 233m, 해발 고도를 감안하여 490m 위치에 있다.

    (안전행정부에 등록된 정식 명칭은 "YTN서울타워"라고...)

     

     

    음료수 파는 분의 포토존인듯...^^

     

     

    "우리 사랑 영원하자" 사랑의 자물쇠들...

     

     

    나무 위에까지...

     

     

      

     

    MBC예능 프로인 '우리 결혼 했어요'에 나와 유명해졌단다.

     

     

    봉수대

    높은 산꼭대기에 봉화를 피워올릴 수 있도록 한 곳으로서 조선시대 군사 통신 제도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불을 올리도록 하였다고 한다.

     

     

    남산의 명물 케이블카는 1962년 운행 시작하였다고 한다.

    # 남산의 본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목멱산이란 옛말의 '마뫼'로 곧 남산이란 뜻이라고...

     

     

    안중근 의사 동상

    안중근 동상은 1959년 서울 숭의여고 교정에 세워졌다가 1967년 남산으로 옮겼다.

    그 후 동상이 실제 모습과 차이가 있다는 논란이 일면서 1973년 같은 자리에 새 동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해 안중근 기념관이 신축 개관하면서 기존 동상이 균열이 많아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현재의 금빛 동상으로 교체됐다고 한다.
     

     

    남산에 유독 항일 위인들의 동상이 많다.

    이에 대하 전우용 박사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일제가 남산 자락에 일본식 신사인 조선신궁과

    안중근 의사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는 박문사(博文寺)를 만들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항일 인물들의 동상을 남산에 세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의 어록비와 석물 휘호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

    합하면 이루고 흩어지면 패한다. 이는 만고의 정한 이치다.  

    (안의사가 동양평화론의 서문 첫 머리에 쓰신 말)

     

     

    안중근 기념관

    1909년 10월 26일에 중국 하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저격, 사살한

    안중근 의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으로 2010년에 신축 개장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 갇힌 이후 1910년 3월 26일까지 옥중에서 쓴 유묵(遺墨)과 자서전 등 수십 점의 유품,

    안의사 초상화와 관련 사진, 건국공로 훈장과 서한, 공판 당시 신문 보도 내용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2010년 "제28회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 수상했다고 한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스카이뷰 사진이다.

    기념관은 12개의 반투명 네모기둥 모양으로 형상화하였다.

     

    12개의 기둥은 1909년 왼손 무명지를 끊고, 대한독립을 맹세했던 안중근 의사와 김백춘,김천화 등

     독립운동가 12인의 단지동맹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설치 미술 '대한국인 안중근’

    붓 대신 작가의 손으로 안중근의사 말씀 80자를 한자 한자 그려 넣었다.

    청색의 산은 한반도의 푸른 기상과 안중근의사의 평화정신을 상징하며, 글씨는 단청색으로 적어

    의사의 말씀이 우리가 꿈꾸는 평화로운 지구촌의 기둥과 서까래가 되어

    모든 인류의 가슴에 영원히 남기를 희망하는 작가의 염원을 담았다.

    (작가 : 설치미술가 강익중 / 설치 :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

     

     

    입구에 먼저 들어가면 중앙홀에서 안중근 의사의 좌상과 함께 약지 혈서 태극기를 마주하게 된다.

    이 태극기는 안중근 의사가 네 번째 손가락(약지)을 단지하며 흘린 피로 적은 ‘대한독립’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최근 SNS에서는 발렌타인데이를 안중근 데이로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고 한다.

    1910년 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뒤 사형 선고를 받은 날이기 때문에

    이날의 의미를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함)

     

     

    안중근 의사는 "내가 죽은 뒤 유골을 하얼빈 공원 옆에 묻었다가 우리나라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이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광복을 맞은 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발굴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효창공원에 안중근 의사 가묘가 있다고 한다.

     

     

    얼마전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 있을 당시 그에게 보낸 어머니 편지가 공개되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오늘 도보관광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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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곽돌에 대한 불편한 진실에 대한 기사가 있기에, 아래 클릭해 읽어 보세요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30506105123578&srchid=IIM%2Fnews%2F67420581%2F12fd8a1ba05e5f58a7ccf2c465718d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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