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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이야기

의선교회 국내성지순례(2)

     

    다음 행선지는 여수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2대목사님)이 1939년 부임해서 1950년 순교 하실 때까지의 애양원교회이다.

    애양원교회는 1909년 광주 봉선리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서 설립당시에는 봉선리 교회였다고 한다.

    현재의 애양원으로 1925년에 이주한후에는 지역의 이름을 따라 신풍교회당이라 불렀고

    1936년에 애양원교회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이후 1982년이 성산교회로 바뀌어서 현재 공식적인 명칭은 성산교회이다.

     

     

    애양원 교회는 손양원 목사의 유업을 받들어 두가지 특징적인 신앙의 도를 닦아 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방문한 순례객은 새벽 4시에 시작하는 새벽예배에 의무적으로 참석한다는 규칙
    또 하나는 정오 12시가 되면 종소리가 울리고 동시에 하던 일을 멈추고 3분 정도 기도를 드린다.

    첫째,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고, 둘째는 가족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셋째는 교회를 위해서 매일 기도하고 있다.

     

     

    여수 애양원

     

    1909년4월, 한국에 처음으로 나병원이 광주에 세워졌다.

    목포에서 의료선교사 포싸이드 의사는 광주기독병원의 윌슨으로부터 전보 한 장을 받았다.

    사연인즉, 오웬선교사가 병에 걸려 위독하니 광주로 빨리 올라오라는 내용이었다.

    포싸이드 의사는 전보를 받은 즉시 60 마일이나 되는 길을 조랑말을 타고 출발했다.

    광주가 13마일 남아 있는 곳에서 예기치 않는 일이 벌어졌다. 길가에 사람이 쓰러져 있지 않는가!.

    포싸이트의사는 위독한 동료선교사의 병을 보러 가는 바쁜 몸이지만 그냥 갈 수 가 없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보았다.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옷에는 피와 고름으로 얼룩져있었다. 자세히 보니 한센병 환자였다.

    포싸이트 의사는 그환자를 말에 태우고 자기는 마부가 되어 하루 밤을 노상에서 보내고

    그 이튼날 광주에 도착했고 윌슨이 원장으로 있는 기독병원에 데리고 갔으나

    그런 사람(한센병환자)을 치료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다시 여자 환자를 말에 태우고 병원을 나왔으나 갈곳이 없었었다.

    그는 벽돌 가마터에 환자의 거처를 마련, 치료해주고 복음을 전해준 것이 애양원의 시작이다.

    현대식 병원이 세워지기 전 처음 사용했던 병원은 현재 애양원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용서의 표상이 되었던 손양원 목사님을 생각하는 용서의 길을 걸었다.

     

     

    주변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숲을 보며 늘 흔들리는 사람의 모습과 같음을 느꼈고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 흔들리지 않으셨던 손양원 목사님이 떠올랐다.

     

     

    손양원 목사님 추모 상징탑

     

     

    순교기념관은 성산교회 성도들의 헌금과 전국 교회, 개인, 기관들의 도움으로 1994년도에 건립됐다. 
    손양원목사의 순교 신앙을 전승하고 순교자교의 보관 및 기독교 문화 예술 전시, 순교기념 선교 및

    장학사업을 목적으로 건립됐으며, 2012년에는 여수시의 지원을 받아 리모델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건물이 시옷(ㅅ)자 형태인데, 이는 손양원목사의 성씨를 상징한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삼위일체 및 손양원목사와 그의 두 아들을 상징한다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계2:10)


    손양원목사님을 설명하는 글들...

    1936년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 원탁 사건으로 애양원교회를 비롯한 순천노회 대부분 목사와 장로들이 검속되었다.

    그 당시 애양원교회를 담임하던 손양원목사도 구속되었다.

    그는 원탁회 사건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한 강력한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줄곧 옥중생활을 했다.

    공산군이 남침 중에 교회 장로들이 배를 준비하고 손목사에게 피난을 권유하였으나

    손양원목사는 교인들을 두고 혼자 떠날 수 없다고 끝내 거절하였다.

    공산군 점령 이후에도 후퇴 직전 많은 기독교인, 우익인사들과 함께 여수에서 가까운 미편 과수원에서

    1950년 9월 28일 총살당하심으로 48살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셨다.

     

     

    1948년 여순사건때 손양원 목사님의 아들 동인과 동신 형제가 남한 내부의 빨치산에 의해 학살되었다.

    그 학살자 안재선을 살려내어 양아들로 삼는 놀라운 신앙을 보여 주었다.

     

     

    그때 두아들을 잃고도 감사했던 손양원 목사님.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님과 가족 사진인데, 손양원 목사님 턱부분에 하얗게 가려진 이유가 있다고 한다.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군에게 붙잡혀 가셔서도 계속 공산군에게 전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공산군들이 시끄럽다고 총 개머리판으로 목사님의 입을 내리쳐서 입이 짖이겨졌다고 한다

     

    맨우측이 손양원 목사님의 두아들을 죽인 안재선인데...

    손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어서 손목사님의 장례식에서 맏 상주가 되었다고 한다.

    안재선씨의 아들(안경선목사)이 목사가 되셨다고 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디딘 발자국은 /언젠가 뒷사람의 길이 되니라

    이글은 서산대사의 글이라고 한다.
    저 편지는 김구선생님이 손양원 목사님에게 쓰신 편지라고 한다.

     

     

     

     

    뒤의 건물은 손양원 목사님이 나환자 목회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설립하셨던 것으로

    잠시 한성신학교를 세웠다가 폐교되어 1986년 개축을 해서 수양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손양원 목사님의 가족이 안장되어 있는 삼부자 묘(뒤의 묘는 손양원 목사님부부 합장묘)

     

     

    우리는 그분의 용서와 헌신을 묵상하며 찬양 드렸다.

     

    참고

    애양원-> http://www.aeyangwon.org/

    사랑의 원자탄-> http://www.youtube.com/watch?v=TNNM4ngcJq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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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식사후 여수 돌산공원...

    해가 지며 돌산대교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돌산대교는 전라남도 여수시 남산동과 돌산읍 우두리를 연결한 다리로 1984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돌산대교 옆에 작은 섬이 장군도이다.(무인도)

    여수항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으로 둘레가 600m밖에 되지 않는다.

    조선 1497년에 수군절도사 이량 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수중석성이 있는데,

    우리나라 유일의 해저석성(바다 아래에 돌로 쌓은 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2004년 아침드라마 '선택'의 세트장이었다는 찻집.

     

     

    돌산공원에서 본 돌산대교 전망보다 이곳에서의 돌산대교 전망이 더 멋있었다.^^

     

     

    자연을 담은 그릇(?)...^^

     

     

     

    얼결에 상석(?)에 함께하게 되어 주인의 다도, 차에 대한 설명, 시음을 경험할 수 있었다.

     

     

    보이차, 말차, 다즐링등 다양한 차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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