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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이야기

혼자서도 잘해요^^


    가는 길 /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홀려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부지런도 하다...9시반 예약을 하다니...^^

    근데 두남자들이 5시에 일어나 아침주고 나가고 한잠 살짝 자고 일어나도 7시니까..



    9시 30분과 오후 4시반에 특별안내가 있다.

    이번달은 '대한 제국 황실 가족'



    덕수궁 안에 있는 근대 서양식 건물. 영국인 J.M. 브라운의 발의에 의해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문화재청에서는 1930년대 이후에 여러 용도의 건물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던 석조전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되찾고 국민들에게 돌려주고자 2014년 10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어머 왠일이라니?

    원래 그렇지 않았다는데, 오늘 9시30분 신청한 사람이 나뿐이었다고...

    해설자와 둘이 깊은 역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어찌보면 기울어가는 나라의 비운의 황실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순헌황귀비 엄씨(영친왕의 어머니)

    8세가 되던 해에 경복궁에 입궐하여 후에 명성왕후 민비를 모시는 시위 상궁이 되었다.

    이때 32살의 나이로 고종의 승은(承恩)을 입었는데 이를 안 민비의 미움을 사서 궁궐에서 쫓겨난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 된 후 고종의 명으로 10년만에 다시 입궁하여 고종의 후궁이 되었다

    상궁이었던 엄씨는 며칠 동안 가마 2채로 궁을 출입하며 일본의 감시를 느슨하게 한 뒤

    고종과 왕세자 순종을 가마에 태워 러시아공관으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아관파천)

    44살의 나이로 영친왕을 낳고 순헌 황귀비 라는 칭호도 얻었다고 한다.

    고종황제는 엄씨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 했으나 큰 반대에 부딪쳤다고 한다.

    엄씨의 신분이 원래 평민이었고, 숙종이 세워놓은,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법도 때문.

    결국 황후 바로 아래이자, 후궁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황귀비의 직책을 받는 걸로 마무리 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박색이었지만,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겨서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

    그녀는 여성의 신교육을 위해 진명여학교와 명신(숙명)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양정의숙(양정중고교)이 재정난에 허덕이자 땅 200만 평과 내탕금을 기증하는 등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잠깐!

    그렇다면 명성황후는 어떻게 생겼을까?

    석조전에서 찍은 사진인데, 명성황후 사진이 없다.

    알려지는 명성황후 사진이나 초상화는 진위여부를 확인 할수 없다고 한다.

    명성황후 시해후 이토히로부미가 명성황후 사진을 가진 사람은 다 자진 신고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석조전 테라스에서 본 풍경



    '석어당'은 덕수궁 내에 유일한 단청이 없는 2층 건물이다.

    원래의 석어당은 선조가 임란때 피난처로부터 환도하여 승하할 때 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이며

    광해군 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일 뿐 아니라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문책을 당했던 곳이다.



    정관헌으로 들어가는 '유현문'은 아름다워 호암미술관 후원인 '희원' 입구문으로도 재현되었다지



    우리나라 최초로 커피를 즐겼던 고종황제가 이곳 정관헌에서 '양탕국'이라 불렸던 커피를 드셨다고...



    덕수궁을 떠나기전 나도 양탕국 한잔 마시고...^^



    충정각

    충정로역 9번출구로 나와 골목으로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건물을 만날 수 있다.

    1910년께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식 주택이다.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붉은 벽돌집은 9각형의 첨탑과 베란다 라운지, 돌로 된 벽난로와 다락방 등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건축의 아름다움에 반한 미술인회의 대표 성완경 선생이 충정각이라 작명하고,

    고암 정병례 선생이 직접 현판 글씨를 새겨 주었다고....



    갤러리도 같이 하고 있어 서양화가 정미희 작가 작품이 전시중이었다.



    현재 소유자인 문동수씨가 매입하여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문을 열었다고...

    가격이 혼자 먹기에 부담스러워...구경만...^^



    바로옆이 유명한 이명래 고약을 만들던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일본식 꼬치튀김집으로.....



    1930년 지어진 국내 최초 아파트인 충정아파트( 일본인 도요타 다네오가 지었다.)

    1979년 충정로 8차선 확장사업으로 아파트 전면부가 잘려나갔다고 한다.

    2008년 도시환경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세대 간 갈등으로 현재까지 그 형태를 잃지 않고 자리하고 있다고...



    우리나라가 1950년대 후반기에서 1960년대에 걸쳐 서울인구수가 급증하며 무허가 건물이 늘어

    1969년에 많은 아파트를 많이 지으며 많은 부실공사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 다음해에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 있어났다고....

    저 사진은 나 어릴때 살던 사택의 아파트로 1970년쯤 지어졌던 것 같다.

    아파트라기보다 타운하우스 비슷(한집이 1,2층으로 되어 있는 구조)했는데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충정로에 있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건물이었을때, 우리 교회가 세들어 있었다.

    이 근처에 노라노 양재학원이랑 예식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건물은 그대로인데, 지금은 치과와 연구소들이 들어서 있었다.



    충정로에서의 우리 교회 마지막은 강당이었던 저 건물에서 예배드렸었다.

    벌써 20년전 이야기가 되었다.



    그때는 '의료선교교회'였다가, 교회를 지어 옮기면서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은 지역사회 교회로 하기 위해 바뀌었지만,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귀한뜻 변치 않으시리라 믿는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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